조성사업 이후 강화경에 봉안된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긴 시기는 1381년(우왕 7) 4월 이전(이색(李穡), 「송나옹제자인대장해인사(送懶翁弟子印大藏海印寺)」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8, 시 및 이숭인(李崇仁), 「여흥군신륵사대장각기(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동문선(東文選)』 권76, 기)이라는 견해, 1397년(태조 6, 정축년)이라는 해석(해인사 소장의 『석화엄경교분기원통초(釋華嚴經敎分記圓通鈔)』 권10, 10장, 음각)과 달리, 1398년 5월 이후부터 1399년 정월 이전(『태조실록』 권14, 태조 7년 5월 병진․무오 및 『정종실록』 권1, 정종 원년 정월 경진)이라고 일반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요. 해인사의 봉안 배경은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안전성의 확보 등에 있었어요. 
해인사로의 봉안은 국가적 불사로 진행되었어요. 『태조실록』 권14, 태조 7년 5월 병진일(10일)에는 '국왕이 용산강(龍山江 : 지금의 서울 용산구)에 행차하였다. 대장경의 목판을 강화(江華)의 선원사(禪源寺)에서 운반하여 왔다.'고 하였으며, 같은 달 무오일(12일)에는 '대장(隊長)․대부(隊副) 2,000명에게 대장경의 목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어요.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유광우(兪光祐)에게 향로(香爐)를 잡고 따라오게 하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에게 불교 경전을 외우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고 하였어요.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의 인경 작업도 지방관의 지원을 받았어요. 1399년 정월 태상왕 태조가 사재로 인경하면서도 경상도감사(慶尙道監司)에게 지원하게 하였으며, 1413년 3월 태종의 명령으로 인경할 때도 경산도관찰사에게 경제적 지원 등을 수행하게 하였어요(『태종실록』 권25, 태종 13년 3월 경인). 이처럼 강화경에서 해인사로의 봉안 과정과 해인사에서의 인경작업에는 승려들과 더불어 국왕과 중앙의 고위관료 및 경상감사를 비롯한 관료들, 일반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한편, 국가나 왕실의 경제적 지원도 병행되는 등 중요 불교행사로 자리매김하였어요. 이로써 해인사는 민족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의 봉안 사원으로 중요한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었어요. 

해인사로의 이동 경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어요

하나는 육로 이동설이에요
해인사 대적광전에는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어요. 운반 행렬의 맨 앞에는 동자가 향로를 들고 길을 내고, 그 뒤를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행렬을 인도하였어요. 스님의 뒤로는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도 싣고 지게에도 졌는가 하면, 머리에 이기도 한 채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어요. 강화경을 떠나 한강의 용산강에 다다른 배는 다시 남한강을 거쳐 충주에 도착하였어요. 여기서부터는 해인사의 벽화에서처럼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육지로 운반하였어요. 행렬이 낙동강변에 이르면 대장경을 다시 배에 옮겨 싣고 고령까지 이동하여 육로로 해인사에 들어간다는 추정이었어요.
다음으로는 해로 이동설이에요
『태조실록』 권14, 태조 7년 5월 무오일(12일)에는 임금이 서강에 행차해 전라 조운선을 시찰했다고 하였어요. 이는 대장경판이 용산강에 도착한지 이틀 뒤의 기록이었어요. 조운선이란 조세로 거둔 쌀을 운반하던 선박으로서 깊이가 얕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하기 쉬우며, 해변을 항해하기에 유리한 구조이었어요. 1척마다 경판 5,000장을 실을 수 있어, 총20척 정도면 팔만대장경을 운반하는데 충분하였어요. 따라서 기록 속의 조운선은 이틀 전 용산강에 도착한 팔만대장경의 운송수단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았어요. 한강인 용산강에서 서해 바닷길로 나온 다음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고령에 이르러 배를 대고, 이곳에서 해인사까지는 육로로 운반하였을 것이었어요. 
따라서 팔만대장경은 강화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 선원사→ 지천사→ 해인사(육로․해로)로 옮겨졌을 것이었어요.

한편 최근에는 팔만대장경이 강화경의 선원사에서 지천사를 거쳐 옮겨오지 않고 전국의 주요 판각공간에서 조성된 이후 해인사로 각기 운반되었다는 견해도 있어요. 팔만대장경의 판각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판각공간에서 완성된 이후 강화도로 옮기지 않고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강화경의 대장도감이나 해인사로 이동하였다는 것이에요. 이 과정에서 조선 태조 때의 대장경 이운 기사는 강화경의 선원사에 보관된 나머지 팔만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겼던 기록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그 근거는 팔만대장경판이 먼 거리의 이동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경판의 흠집이나 부딪힌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일부의 파손이나 훼손 흔적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어요.